역행자가 되기 위한 과제 - 확률 게임에 대해 적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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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글쓰기

역행자가 되기 위한 과제 - 확률 게임에 대해 적어보자

by 이정리 2022. 8. 23.

자청의 「역행자」 192페이지에서

"당신의 인생에서 성공적이었던 확률 게임으로는 어떤 것이 있었나? 3~4줄 정도 적어보자."

라는 도전을 주었다.

자청, 「역행자」, p.192

이 책에서 하라는 대로 할 것을 결심했기에, 내 인생에서 성공적인 확률 게임이 있었는지 생각해 보았다.

경제적인 성공은 아니었지만 지금의 나를 만든 결정적인 게임 두 가지가 생각났다.

 

첫째는 해외여행을 다녀온 것이었다.

2013년 부터 몇 년 동안은 늘 최악이던 내 인생에서도 가장 최악의 시기였다. 직장도 전략도 삶에 대한 의지, 건강마저 다 잃고 일말의 희망도 없는 상태. 그냥 지리멸렬한 삶을 끝내버리기로 작정한 뒤 생에 처음으로 자신에게 다정한 질문을 하나 했다.

"돈이나 지금까지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따위 신경 끄고, 생의 마지막에 꼭 해보고 싶은 게 뭐지?"

그 답은 '여행'이었다.

그래서 2015년 3월, 태어나서 처음으로 혼자 자유여행을 떠났다. 4박 5일 동안 홋카이도 여행을 다녀온 뒤 조금 더 살아 보고 싶어졌다. 5월에는 7박 8일 동안 동유럽을 여행하고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어떻게든 살아보기로 했다.

 

그리고 2016년 3월, 나는 그동안 모아 놓은 전 재산과 퇴직금, 청약통장까지 털어 70일 동안 해외여행을 떠나기로 한다. 나이는 이미 30대 중반이었고, 몸은 수술을 해야 할 상태였다. 내 이야기를 들은 직장 센터장은 지금 여행 할 때가 아니라 그 돈으로 제대로 심리치료를 받고 더 공부를 해야 할 때라며 만류했다. 하지만 내게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인생에는 계측할 수 없지만 반드시 채워야 할 지랄의 총량이 있다고 믿었다. 어려서 총량만큼의 지랄의 양을 채우지 못하면 나이 들어 추한 모습으로 지랄을 하게 될 것이다. 이 지랄의 총량을 해결해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둘째, 그동안 나는 너무나 많은 두려움을 가졌고 아무것도 제대로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이래서 안 되고 저래서 안 되고... 그 틀을 깬 첫 도전이 여행이었고, 내가 어디까지 견딜 수 있는지 시험해 보고 싶었다. 그래서 70일이라는 일정 속에 산띠아고 순례길과 모로코의 사하라 사막 투어를 넣었다.

 

셋째, 번아웃 증후군으로 더 이상 상담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여행을 하며 이전까지의 내 인생과 거리를 두고 재충전을 하면 상담을 다시 할 수 있는 상태가 될 것이라 기대했다.

 

남들이 뭐라 해도 이것은 '확률 게임'에서 높은 승률을 가진 게임이었기에 나는 말 그대로 인생을 베팅했고, 생에 첫 자신과의 화해라는 기적 같은 결과를 얻게 되었다. 그리고 어딜 가든, 어떻게든 살아 남을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고, 세상은 참으로 넓고 사람은 다양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편견과 아집에 사로 잡혀 타인을 비판하던 오만함도 많이 깨졌다.

이 때의 경험은 몇 년 뒤 글Ego라는 글쓰기 프로젝트를 통해 책으로 출판했다. 흥행은 참패했고 수익으로 연결되지도 않았지만....

 

두 번째 확률 게임은 출가, 정확히는 가출이었.

나는 작년까지, 부끄러울 정도로 늦은 나이까지 부모님과 함께 살았다. 돈 문제가 가장 컸지만 나의 독립을 절대 반대하는 부모님의 주장 또한 만만치 않았다. 나 역시 그분들의 실패와 두려움에 대한 해석을 내재화하고 있었다.

나는 독립할 수 없어.

나는 부족해.

세상은 무서운 곳이고 내게는 세상을 이길 전략이 없어.

집 나가면 숨만 쉬어도 돈이 나가.

지금 어설프게 독립하면 평생 월세 신세가 될 수밖에 없어.

 

하지만 나의 가정은 가정폭력의 현장이었다. 지금은 아니지만 그 오랜 상처는 쉬이 잊히지 않고, 가스라이팅은 현재진행형이었다. 부모님과의 부대낌은 내게 끊임 없는 분노와 자기 혐오라는 감정 소모로 이어졌다. 이런 비생산적이고 파괴적인 감정소모 때문에 정신 에너지가 고갈되어 미래를 긍정적으로 설계할 힘이 없었다.

더 이상 과거에 머물러 현재를 망칠 수는 없었다.

길게 보면 내 인생을 위해 베팅을 해야 하는 게임이었다. 그래서 가출을 해 버렸다.

처음 한 달은 코리빙하우스, 한 달 뒤 지인 부부가 있는 이곳 신림동.

 

그 과정에서 우울증과 공황장애, 수면장애가 재발하고 몇 달 동안 정신과 약을 먹어야 했지만 10개월이 지난 지금, 독립은 정말 최고의 선택이었다. 불필요한 감정소모가 사라지며 긍정적인 마음이 회복되었고, 좀 더 자신에게 집중하되 이전과 다른 해석을 하게 되었다.

 

이 두 가지를 적고 보니 공통점이 '있는 힘을 다해 도망쳤다'는 것임을 깨닫는다.

무언가를 '얻기' 위해 도전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내 삶이 그래 왔기에 후회나 부끄러움은 없다.

깊이 패이고 황폐해진 기초 위에는 아무것도 세울 수 없으니까. 나는 최선을 다해 도망침으로써 마이너스였던 인생을 최소한 그라운드 제로로 올려 놓았다. 그 치열했던 과정에서 소중한 경험을 했고, 강한 정신력을 가지게 되었다.

이제 이 위에 무엇이라도 견고하게 세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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