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grad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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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글쓰기

degradation

by 이정리 2020. 8. 16.

게이츠헤드에서 학대 받던 제인 에어는 저항의 대가로 '붉은 방'에 갇히게 된다. 외삼촌의 유령(환영)을 본 충격으로 심신이 쇠약해진 제인에게 약제사 로이드가 이것 저것 물어보다 친부와 친척에 대해 이야기하게 된다.

 

로이드 : 리드 부인 말고는 친척이 없니?

..(중략)

제인 : 리드 외숙모에게 한 번 물어보긴 했는데, 어쩌면 에어라는 성을 가진 가난하고 신분 낮은 친척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생략)

로이드 : 그런 친척이 있다면 가고 싶니?

제인 : .. (중략).. '나에게 가난은 타락과 비슷한 말이었다.'

 

제인이 생각한 가난은 타락, 원문은 degradation이다. (사회, 경제적 지위의) 하락, 퇴보라는 의미가 더 정확할 거다. 어떤 판본에서는 '죄악'이라고 번역했던 기억이 난다.

 

 

「돈의 속성」의 저자 김승호는 삶의 가치가 부의 축적보다 중요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대개 가난이 얼마나 무서운지 모른다고 말한다. 가난의 무서움을 모르는 사람은 부자가 될 기회를 얻기 힘들다고. 나는 그의 말에 동의한다. 

 

오래 전 배우 정우성 씨가 자신이 가난했던 일화를 얘기했다. 재개발이 되어 허물어 가던 판자촌에 살았는데 이사갈 돈이 없어 가장 마지막에 남은 집이 자신의 집이었다고. 그의 얘기를 들은 패널들의 호들갑스러운 반응에 비로소 깨달았다. 그런 게 가난이고, 내가 정말 가난했다는 걸.

 

아주 어렸을 때, 신림동 지하 단칸방에서 네 식구가 살았다. 그 단칸방에서 나왔을 땐 가진 전세보증금으로는 신림동에 방을 구할 수 없어 흘러온 곳이 금호동 1가 산동네였다. 무허가 판자촌. 달동네. 그 중에서도 가장 꼭대기. 지금도 그 주소를 기억한다.

 

서울 성동구 금호동 1가 1232번지 23통 7반.

 

9평 부지에 세 가구가 마당을 공유하며 살았다. 10년 동안.

냄새나고 너저분하고 추잡한 곳이었다. 수많은 폭력과 크고 작은 범죄가 일어났다. 천박하고 무식한 공간이었다.

집에서는 단 하루도 고성과 욕설이 오가지 않은 날이 없었고 나는 심각한 마음의 병을 얻었다. 극도의 불안과 공포, 자살중독, 우울증, 분노조절장애, 공황장애 없는 공황발작, 섭식장애, 강박증 등 진단 가능한 질환과 이상심리적 증상이 모두 나타났지만 철저히 방치되었다.

늘 악몽을 꾸던 시절에 언제나 그 집만 나왔다. 수십 번 이사를 다녔어도 그 집만 나왔다. 몇 년 전까지도 심하게 스트레스를 받으면 꿈에 나왔다. 트라우마였다.

 

오래 끌어온 재개발이 확정되고 동네 사람들이 하나 둘 떠나갔지만 우리 집은 떠나지 못했다. 이사갈 돈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동네가 텅텅 비고 집 바로 앞까지 허물어졌을 때 겨우 옆 동네 반지하로 이사를 갈 수 있었다. 반지하였지만 벽이 울퉁불퉁하지 않고 반듯하다는 것만으로 왕궁에 들어온 느낌이었던 걸 기억한다.

 

반공사상을 고취하기 위해 국민학교 교과서에 실렸던 '가난하지만 화목하고 행복한 남한의 소시민' 이야기는 내게 가증스러움과 불신을 안겨주었다. 교과서가 틀렸다는 것을 어린 나이에 깨달았다. 가난의 천박함과 무서움을 뼛속까지 알고 있었기에.

 

마음이 병들어 있었기 때문인지 나는 그런 가난의 무서움을 동력 삼아 부자가 될 근성은 가지지 못했다. 그저 가난이 내 운명이고 절대 부자는 될 수 없다고 믿어 왔다. 돈이 없으니 물욕도 없어야 했다. 소박해야 했고 가난과 소박함을 미덕으로 삼는 선동에 세뇌되었다. 학습된 무기력일 수도 있다.

 

김승호의 글을 읽으며 내 상처를 미덕으로 삼을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적어도 나는, 가난이 얼마나 잔인하고 무서운지 잘 안다. 가난 때문에 인간성이 어디까지 파괴되고 천해질 수 있는지 나 자신이 겪어냈기에 잘 안다. 이전까지 그것이 한낱 '상처'에 지나지 않았다면, 이제 내가 앞으로 나갈 동력으로 삼을 것이다.

 

과거의 고통이 의미를 가지고 긍정적으로 해석되는 건, 결국 미래의 내가 잘 되었을 때 가능한 거다. 그것이 바로 지난 시간의 자신까지 온전히 사랑하는 방법인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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