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사진 찍는 걸 깜빡하고 반납해서 구글 이미지로.

도서관에서 처음 몇 페이지를 읽고 마음에 들어 빌렸다.
이 책은 헤밍웨이가 파리에서 생활했을 때의 경험을 쓴 산문집이다.
돈이 되는 특파원 일을 그만둔 뒤 어려운 주머니 사정에도 파리의 카페에 앉아 글을 쓰던 25살 헤밍웨이가 만난 사람, 풍경과 경험한 것들.
헤밍웨이 특유의 구체적이고 세밀한 묘사 덕분에 내가 1900년대 파리에 와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생각난 김에 파리에서 찍은 사진 몇 장.

이 글에도 몇 번 나오는 뤽상부르 공원. 파리에 도착해서 내내 비 오고 우중충하고 추운 날씨만 계속되었는데 이날 처음으로 해가 났다. 해가 든 파리의 하늘은 놀라울 정도로 낮고 푸르렀다. 하늘만큼 놀라웠던 건 도시의 색. 파리가 이렇게 다채로운 색을 지닌 도시라는 걸 처음 깨달았다.

파리에서 가장 좋았던 곳은 로뎅 미술관이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좋았던 건 까미유 끌로델의 이 조각.

미국인 헤밍웨이가 당연히 들렀던 영어 서점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 카페에서 음식을 주문하고 노천 테이블에 앉으면 노트르담 성당을 볼 수 있다.
아래 사진은 다른 곳에서 찍은 거지만.

내가 두 번째 파리에 갔을 땐 6월임에도 패딩을 입어야 할 정도로 추웠고, 100여 년 만에 폭우가 쏟아져 센 강이 역대급으로 범람한 상태였다.ㅡㅡ
난생 처음 보는 진기한 풍경에 파리지앵들이 모두 나와 신나게 인증샷을 찍는 걸 보는 것도 나름의 재미였던...
정작 한국인 관광객들은 서울에서는 해마다 한강에서 보던 풍경이라 놀라지도 않았다.(역시 헬던트 실사판...)
센 강변에 있던 노천 카페들은 모조리 물에 잠겼고, 부실한 지하철 역의 벽에는 구멍이 뚫려 빗물이 콸콸 쏟아지고, 미술품 보호를 위해 루브르, 오르셰 등 어지간한 미술관과 박물관은 폐쇄되었다. 첫 방문 때 이미 두 번 이상 가 보아서 그건 괜찮았는데, 페르 라셰즈도 폐쇄되어 에디트 피아프의 무덤을 볼 수 없었다.ㅠㅜ


파리 풍경은 대충 이렇고...
스콧 피츠제랄드에 대해서는 상당한 지면을 할애해 묘사하고 있고, 그와 겪었던 일들도 많이 적혀 있다. 그의 잘생긴 얼굴과 매우 짧은 다리(!!)에 대한 디테일한 묘사 등.ㅡㅡ 특히 둘이 술을 퍼마시는 상황을 어찌나 잘 묘사했는지, 공부를 위해 금주를 결심했음에도 시원한 맥주 한 잔이 간절히 땡기는 마성의 필력이란.
피츠제랄드의 차를 찾으러 둘이 여행 다녀온 뒤 헤밍웨이는 사실상 손절각을 재고 있었지만... 「위대한 개츠비」를 읽고 난 뒤, 이런 책을 쓴 남자라면 모든 걸 포용하고 친구가 되기로 결심한다.(...) 그 후 주량도 작은 주제에 과음을 하고 개가 되어 민폐짓 하는 피츠제랄드를 좇아다니며 주변 사람들(특히, 피츠제랄드 피셜 임질 전문 의사)에게 굽신굽신 사과하는 헤밍웨이의 모습은 꼴마초였다던 그의 성정과는 참으로 달라보인다.ㅡㅡ
이 책의 백미(?)는 마지막 두 장에 걸쳐 나온다.
첫 아내 해들리와 결별하게 된 이유.
두 사람 사이에 젊은 여자가 끼어들었고, 헤밍웨이가 홀딱 넘어갔다.
그래놓고 이 작가양반이 하는 말이 가관이다.
"나는 두 사람을 동시에 사랑했다."
아... 예.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인데...

무려 100년을 앞서간 이태오의 선배님 되시겠다.ㅡㅡ
상간녀를 만날 때는 그 여자를 진심으로 사랑했다.
아내 해들리를 만날 때는 상간녀는 전혀 생각나지 않고 오직 아내만을 사랑했다.
그리고 이 교활한 양반은 자신을 천하의 개쌍놈이라며 도덕적인 척은 놓지 않는다.
(진짜 잘못했다고 생각했으면 그 뒤로 바람을 안 피웠겠지.ㅡㅡ)
내 눈에는 작가라 머리는 잘 돌아가서 위악을 떨어주는 것도 잊지 않는 교활함으로 보일 뿐이지만.
그럼에도, 도덕적인 기준을 잠시 내려놓으면 글 자체는 훌륭하다. 양다리 걸친 남자의 심리도 잘 보여주어서, 소설을 습작하고 싶다면 참고할 만하다.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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