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니스트 헤밍웨이, 「무기여 잘 있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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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책

어니스트 헤밍웨이, 「무기여 잘 있어라」

by 이정리 2021. 1. 28.

운영시간 단축에 테이블과 의자도 사라졌지만 그래도 동네 구립도서관이 다시 열려서 책을 빌리러 갔다.

읽을 책을 정하고 간 건 아니었지만, 그냥 책들이 진열된 공간의 공기와 분위기를 느끼고 싶었다.

세상에서 가장 마음 편하고 익숙한 곳.

가장 내가 나 다워지는 느낌을 받을 수 있는 곳.

그저 책을 좋아할 뿐, 대단한 독서가는 아니지만... 내게 도서관이란 그런 곳이다.

 

일 하느라 바쁘고 피곤해서,

더 이상 실용적이지 않은 고전 따위 집어치우고 부우자가 되기 위해 금융서적을 읽겠다는 결심 때문에,

시험 공부를 하기로 했기 때문에.... 그런 이유로 한동안 고전이나 문학, 인문학 등을 읽지 않았다.

그런데 평생 쌓아 온 습관이나 체질이란 건 그리 쉽게 바뀌는 게 아닌가보다.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것처럼 불편하고 갑갑해서, 공부고 뭐고 그냥 읽고 싶은 책을 읽기로 했다.

 

꼭 헤밍웨이를 읽어야겠다고 생각한 건 아니지만, 주른히 진열된 민음사 전집을 보니 문득 위대한 작가가 위대한 이유가 궁금해졌다. 한 번쯤은 들어 봤지만 읽어보지는 않은 유명한 책. 작가. 그래서 헤밍웨이의 「무기여 잘 있어라」를 골랐다.

 

이 책은 제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미국인 의무장교(앰뷸런스 부대를 지휘한다) 프레데릭 헨리의 시점으로 써진 소설이다. 이탈리아 전방에서 복무하던 헨리는 간호사로 일하는 캐서린 바클리라는 여자를 만나게 된다. 처음에는 바클리와 가볍게 만나(정확히는 갖고 놀다 버릴 생각이었다.ㅡㅡ)려고 했지만 점차 마음을 빼앗기게 된다. 약혼자를 전쟁으로 잃은 바클리는 초반엔 약간 정신줄이 오락가락 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역시 헨리에게 깊이 빠지게 된다.

다리 부상을 입은 헨리가 밀라노로 이송되어 치료 받는 동안 바클리는 그곳으로 따라가 간호 업무를 맡게 되고 두 사람의 몸과 마음은 점점 깊이 가까워진다. 그러다 바클리가 헨리의 아이를 가지게 되고, 부상이 회복된 헨리는 다시 전선에 배치된다.

전황은 불리하게 돌아가고, 후퇴하던 중 헨리는 같은 이탈리아 군인에게 총살당할 위기에 놓이게 된다. 총살을 앞두고 강물에 뛰어들어 간신히 목숨을 구한 헨리는 탈영병 신세가 되었고, 다시 바클리를 찾아 배를 타고 스위스로 도피하게 된다. 중립지대인 스위스에서 겨울을 나며 둘은 행복한 시간을 가지지만, 봄, 바클리는 사산아를 낳고 죽는다.

 

줄거리는 매우 간단하고 단순하다. 21세기 식의 복잡한 심리묘사나 인물 간의 복잡다단한 갈등도 없다. 21세기 의학상식으로 보면 식겁할 내용도 많다. 임산부가 맥주와 독주를 마시고(심지어 의사가 맥주를 추천한다. 애가 작게 나오는데 도움이 된다며ㅡㅡ), 들것이 없어 다리에 파편이 박힌 부상병을 들쳐메고 가다 몇 번씩 바닥에 떨어뜨린다...ㅡㅡ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시대의 한계일 뿐 이런 걸로 이 소설을 폄하한다면 내가 더 무식한 사람인 게지.

 

문장도 깔끔하고 간결해서 정말 술술 읽힌다. 다만, 작가 자신이 참전 경험이 있기 때문인지 전쟁, 부상의 참혹함이 정말 사실적으로 자세하게 묘사된다. 특히 헨리가 부상당하는 장면은 내가 전장에 같이 있는 것 같이 느껴질 정도로 생생해서 읽기가 힘들 정도였다.

내가 지향하는 문장이 황순원 선생님처럼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것, 백석 선생님처럼 눈에 잡힐듯 생생하고 구체적인 묘사인데(향토 음식을 묘사하는 글을 정말 눈 앞에 식탁이 펼쳐지는 것 같고 내 입에 그 음식이 들어와 있는 것 같다), 헤밍웨이의 문장이 바로 그렇다. 비록 번역이지만 건조할 정도로 깔끔한 문장 하나 하나가 탐이 났다. 문장 때문에 책이 재미있을 수도 있다는 것도 처음 경험했다.

세속적이고, 전쟁에 대해 관조적이던 헨리는 강물에 뛰어드는 순간 전쟁에 대한 깊은 회의와 허무에 빠진다. 그 순간이 '무기여 잘 있어라'라고 말하게 되는 지점이었을 거다. 차가운 강물에서 살아 나온 뒤 헨리가 묘사하는 풍경은 이전과 사뭇 다르다. 군복을 벗은 헨리는 자유와 평화를 만끽하며 비로소 전쟁터에서의 압박과 불안을 인식한 것 같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책이 딱히 반전 소설인 것 같지는 않다. 결국 어디에도 정착할 수 없고 평안을 얻을 수 없는 인간의 불안과 위태로움 자체를 전쟁이라는 소재를 빌어 이야기한 것 같기도.

헨리의 목숨을 위협하는 것이 적군이 아닌 이탈리아 군이라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전쟁이 얼마나 허망하며 비합리적인지 말해주는 장치 같다. 인간의 이중성, 비합리, 잔혹함.

 

내가 좋아하는 소설 중 하나가 체임 포톡의 「탈무드의 아들」이라는 미국 소설이다. 이 소설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의 유대사회가 배경이다. 건조하고 구체적인 문장과 이 소설이 말하는 고통의 의미가 좋아서 몇 번이나 읽었던 소설인데, 주인공의 친구(가 되는) 대니 손더스가 이 「무기여 잘 있어라」의 일부를 인용해서 인간이 얼마나 잔혹한지 이야기한다.

바로 헨리가 장작에 붙은 불을 피해 도망치던 개미들 위에 물을 부어 개미들을 구워(?)버리는 장면. 대놓고 헤밍웨이의 위대함을 찬양하는 장면을 굳이 넣은 이 소설은, 헤밍웨이를 읽고 보니 그의 영향을 엄청나게 많이 받은 작품이었다.

(이래서 고전을 읽어야 하나 보다)

 

캐서린 바클리의 내면은 거의 나오지 않은 채 헨리의 비극을 극대화하는 도구로 소모된 것 같다. 뭐 이 소설이 나온 시대가 그렇고 헤밍웨이라는 사람 자체도 그래서 기대도 하지 않았지만.ㅡㅡ 이런 게 불편하다면 추천하고 싶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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