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정리의 여왕'이라는 곤도 마리의 방식으로 방을 정리하기로 했다.
방법은
1. 포스트잇과 필기구를 챙기고 장갑을 낀 뒤 집에서 가장 큰 이불을 거실 바닥에 편다.
2. 이불 정중앙에 서서 집 안 사방을 향해 한 번씩 인사를 한다. "집 안에 있는 물건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 여러분을 모시고 정리정돈하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3. 모든 서랍에 있는 모든 물건을 이불 위에 꺼내 놓되 던지지 말고 차근차근 올린다.
4. 사죄와 존중의 의미를 담아 무릎을 꿇고 앉아 물건 하나를 집어들고 이 물건이 나를 설레게 하는지 느껴본다.
5. 여전히 설레는 물건은 오른쪽, 설레지 않는 물건은 "그동안 고마웠워" 혹은 "사용하지 않고 버려둬서 미안해"라고 말하고 "안녕, 잘 가"라고 인사한 뒤 왼쪽에 둔다.
6. 분류를 마친 뒤 왼쪽에 있는 물건 중 쓸만한 건 기부하거나 팔고, 버릴 건 버린다.
7. 오른쪽에 있는 물건은 종류별로 분류해 한 서랍에 한 종류씩 넣는다.
8. 자리를 잡은 서랍에 포스트잇으로 임시 이름을 적는다. 정리가 다 끝나면 전문 레이블 기계로 서랍마다 해당 이름을 정갈하게 인쇄해서 붙여놓는다.
9. 일이 다 끝나면 이불을 정리해서 넣고 차 한잔 마시며 반성의 시간을 갖는다.
정말로 하나부터 열까지 '일본적'인 방법이다.ㅡㅡ
그리고 이불 위에서 사방에 인사하는 내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손발이 오그라들 것 같았다.
하.지.만.
했다.
난 부자가 될 거니까.
내가 종교에 심취했던 시절, 모태신앙인들 사이에서 백치미를 자랑하다 집단의 신학 마스터 대우를 받게까지 된 건, 정말로 겸손하게 성경책을 정독하고 올바른 리더들이 시키는 걸 토씨 하나 안 틀리고 그대로 했기 때문이었다. 종교에 심취한다는 건 인생에 커다란 해악이기도 하지만 그런 겸손한 자세, 근성 그런 건 내 자산이 된 건 확실하다.
이제 돈 덕질을 시작하고 늦은 나이지만 부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난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미 부자이고 지혜로운 사람을 무조건 따르는 것이 맞다. 그에 대한 비판은 나중의 일이다. 내가 존경해 마지 않던 작가 C.S.루이스의 책을 올바로 비판하기 까지 그의 책을 처음 접한 날로부터 대략 6년이 걸렸다. 그러기 위해 치열하고 지독하게 공부했다. 심지어 그 무지막지하게 두꺼운 성경책을 18번 정독했다. 시편과 잠언, 전도서는 200번 넘게 읽었다.
다만 나는 집 전체가 아닌 내 방만 정리하는 거고, 침대 때문에 이불을 바닥에 펼칠 수 없어 침대에 물건을 놓기로 했다. 높이 때문에 무릎을 꿇기 어렵고, 방이 좁아서 좌우 분류도 어려웠지만 기본에는 충실하게 해 보기로.
물건을 반쯤 꺼냈을 때의 상황.
예견된 현타가 파도처럼 밀려온다.ㅡㅡ
저자는 부끄러울 거라고 했는데 진짜 부끄러워서 창문으로 도망치고 싶었다.
김도향의 노래 가사처럼 난 참 바보처럼 살았던 것 같다. 도대체 왜....?????
이런 식의 정리는 회사에서 하루 종일 쉬지 못하고 일했을 때보다 정신적, 체력적으로 더 힘들었다. 놀랍게도.
정리 정돈이라는 건, 뜻밖에 상당한 창의력과 정신력을 요구하는 일이었다. 관습에 따라 주어진 일을 수동적으로 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2017년에 구매해서 상온에 방치한 음료수와, 유통기한이 2016년 까지였던 약들과...
중간에 너무 힘들어서 밥도 먹고 쉬기도 했지만 정리를 시작하고 12시간이 지난 지금도 정리가 다 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곤도 마리의 방식을 인용한 저자는 이게 하루만에 끝난다고는 안 했던 것 같다.
그래도 분류는 어느 정도 되었고, (구)(구)최애의 굿즈는 모두 다른 팬에게 무료로 양도하기로 했다. 좋은 주인에게 가길 바라는 마음으로 하나 하나 정성스럽게 포장했고, 내일 우체국 택배 착불로 보내면 그 친구들에 대한 내 일은 끝난다.
문제는 가장 많은 부피를 차지하는 (구)최애, (현)차애의 굿즈인데... 무료로 양도받아 되팔이 하려는 장사치 말고 진짜 팬에게 갔으면 하는 마음 때문에 어찌 해야 할 바를 모르겠다.
아직 침대 밑은 손도 못 댔는데 내일까지 정리를 끝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런 뜻밖의 선물을 발견할 때도 있다. 이거 1년 전에 산 건데 마시고 죽진 않겠지.ㅡㅡ
'정리 중'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영어 노베이스의 지텔프(G-TELP) 합격기 (0) | 2020.11.13 |
---|---|
드디어 청소를 마치다 (0) | 2020.08.20 |
퇴사 후 둘째 날 (0) | 2020.08.16 |
퇴사 후 첫날 (0) | 2020.08.15 |
무엇이 나를 지치게 할까? (0) | 2020.08.09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