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룸을 구하고 독립생활을 시작한지 7개월 정도 되어 간다.
독립생활 초기 나를 힘들게 한 건 측간 소음이었다.
독립 초 과격한 독립운동(?)의 후유증으로 공황장애와 우울증이 재발했고, 고질적인 수면장애가 더 심해져 독한 항우울제와 졸피뎀(절대로 처방전 없이 구입할 수 없는 그 마약류 졸피뎀 맞다) 부작용, 백신 후유증 등으로 이중 삼중 고생하고 있었다.
상태가 상당히 안 좋다는 주치의 소견에 따라 독한 약을 꽤 많이 투여했음에도 잠을 이룰 수 없을 정도로 옆집의 소음은 심각했다.
아침에는 온 건물이 울리도록 음악을 틀어 놓고, 거의 매일 자정 넘어 새벽 네다섯 시까지 쌍욕과 비명을 동반한 전화통화. 고래 고래 소리 지르다 갑자기 울다가 화내다가 어느 날은 집에 강도 들어온 것처럼 비명을 질러대니 옆에서 듣다 보면 같이 돌아버릴 지경.... 은 무슨. 정신과 질환 병력이 살아온 날과 맞먹을 정도로 이미 빙글 돌아있던 나는 임계점을 정해 놓고 그 선을 넘는 순간 조치를 취하기로 했다.
아침마다 울리는 음악은 직접 찾아가 좋게 얘기해서 해결했다.
그러나 그놈의 전화 통화는 그칠 줄 몰랐고, 어느 토요일에는 친구를 데려와서는 다음 날 새벽 5시 반까지 쉬지 않고 떠들어댔다.
졸피뎀을 먹었음에도 한숨도 못 잤고, '이 구역의 미친 년은 나다'라는 유치하고 손발 오그라드는 수단을 동원하기로 했다.
인내심이 임계점에 달했을 때 복도로 나가 반평생 수련해 온 복식호읍으로 "지금이 몇 시인 줄 알아? 제정신이야?!"라는 일갈과 "XX, 누군 소리 지를 줄 몰라서 안 지르는 줄 알아?!"라는 쌍욕을 퍼부어 주었다. 나는 성량이 매우 큰 편이다.
떠들어대던 소리는 뚝 그쳤고 며칠 동안 평화로운 날이 이어졌다.
나한테는 옆집 사람이 무개념녀였지만 그 사람 입장에서는 내가 무슨 해코지를 할 지 모를 미친 년으로 보였을 것 같다. 차라리 미친 년 취급 받고 기피 대상이 되는 게 나을 때가 있다.
하지만 효과는 정말 일주일 정도였다.
그 후 또 정신 못차리고 자정 넘어 무슨 게임을 하는지 또 고래고래 통화를 하기에 두 번째로 그 집의 초인종을 눌렀다.
썩은 표정으로 이웃집 그녀를 노려보며 "지금이 몇 시인 줄 아세요?"로 말을 시작했다.
이 집에 거주한 지 몇 달이 되었으면 아무리 신축에 풀옵션이라도 방음이 엉망인 걸 알 만도 한데, 놀랍게도 이웃집 그녀는 자신이 만든 소음이 이웃에 얼마나 거슬리는지 인지를 전혀 못하고 있는 듯했다.
내가 정말 죽일 듯이 노려보자 겁에 질린 목소리로 연신 죄송하다고 했지만 몇 달 묵은 내 화가 가라앉을 리 없었다. 나는 큰 소리 내지 않고 내 할 말을 다 한 뒤, 다시는 한밤중에 소음을 내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고 집으로 돌아왔다.
잠시 후 숨 죽여 울며 누군가와 통화하는 이웃집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며, 진짜 지독히도 방음 안되는 이 집의 시공사의 목을 조르고 싶은 기분을 느꼈다.
그래도 그 후로 측간 소음은 거짓말처럼 사라졌고, 나는 드디어 평화가 찾아온 줄 알았으나....
이번에는 윗층에서 그야말로 전형적인 층간 소음에 시달리게 되었다.
윗집의 층간 소음은 좀 신기했는데, 내가 옆집과 전쟁을 치르는 동안은 정말 사람 사는 것 같지 않게 조용했다. 그런데 옆집 소음이 해결되자 마자 거짓말처럼 윗집 소음이 시작되었는데... 밤새 도록 쿵쾅거리고, 시도 때도 없이 망치발로 쿵쿵 돌아다니고, 새벽 3, 4시에 물을 콸콸콸콸콸 쏟아 내리고 한밤 중에 남녀 둘이 쌍으로 온 건물이 울리게 노래를 불러댔다.
이때는 너무 화가 나서 윗집으로 뛰어 올라갔는데 놀랍게도 초인종이 울리지 않았다. 초인종 전원을 꺼 버린 건데 대체 왜.....?
작디 작은 내 방보다 작은 윗층에서 성인 둘이 살 수 있다는 것도 신기했지만, 도대체 왜 새벽 3, 4시에 그렇게 많은 물을 쓰는 건지. 망가진 초인종과, 문득 모 토막살인범이 과도한 수도요금 때문에 덜미를 잡혔다는 이야기가.....ㅡㅡ
대충, 혼자 살던 윗집 그녀에게 남자 친구가 생겼고 둘이 반 동거를 하다가 주로 남자가 유발하는 소음 때문에 내가 괴로워지기 시작했다는 것을 강제로 알게 되었다. 전혀 알고 싶지 않은 윗집의 일상을 소음 때문에 알게 되는 것도 고역이었다.
그러던 중 어느 새벽, 윗집에서 거하게 소리 지르고 집어 던지며 싸워대다 뭔가 부서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났다. 마침 밖에 나가던 중이라 신경을 껐고, 돌아오면서 보니 유리창이 깨져 있었다.ㅡㅡ
그리고 몇 시간 뒤, 관리자에게서 문자가 왔다.
이웃 간 소음에 직접 대처하거나 공개적으로 망신을 주지 말고 관리자를 통해 해결하라는 내용이었다.
응...?
순간 이것은 소음 유발자를 옹호하는 공지인가 내 눈을 의심했다.
그럼 소음이 생기는 그 한밤중, 공휴일에도 관리자에게 연락하면 바로 해결해준다는 건가?
그리고 나 말고도 층간 측간 소음에 시달린 누군가가 대자보라도 붙였나?
내 윗집에서 유리창 깨먹은 건 알고나 있나?(보증금에서 까면 되긴 할거다)
일단 정중히 층간 소음에 대한 문자를 보냈고 주의 안내를 했다는 관리자의 답도 받았지만.... 달라진 건 없었다.
그냥 반쯤 포기하고 살다, 오늘.
대략 오전 1시 넘어서 또 윗집에서 싸움을 벌이기 시작했다. 목소리가 점점 높아지고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아 내 임계점을 넘어버렸다.
윗층으로 올라가 초인종이 고장난 걸 알고 있기에 발로 문을 계속 찼다. 이쯤 되면 조용히 하든 나와 보든 할텐데 조용하지도, 누가 나오지도 않았다. 오히려 맞은편 집에서 남자가 나와 반쯤 체념한 표정과 목소리로 "시끄러워서 올라오셨죠?"라며 윗집 초인종을 눌러주었다. 하지만 역시 초인종은 울리지 않았다.
윗집이 조용해질 때까지 문을 발로 차다가, 드디어 조용해지자 집으로 내려와서 마저 양치질을 하고 있는데(칫솔을 입에 문 채로 올라갔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놀랍게도 윗층 여자와 맞은편 남자가 같이 내려왔는데, 맞은편 남자는 그 문자를 보낸 관리자였다.ㅡㅡ
그러니까 이 환장의 커플은 관리자 맞은편에 살면서 그렇게 무개념으로 소음을 유발해 왔다는 것.
이 무개념에 뒷목 잡아야 할지 물러 터진 관리자에게 혈압 올려야 할지...
일단, 정말로 누군가 내 윗층에 대한 대자보를 붙였다는 걸 알게 되었다. 관리자는 내가 그 대자보를 붙인 사람인지 물어보았지만 나는 대자보의 존재 자체를 그때 처음 알았다.
역시나 썩은 표정으로 윗집 그녀를 노려보며 "지금이 몇 시인 지 아세요?"로 말을 시작했다.
거의 매일 발생하는 소음에 대해, 몇 주 전 있었던 기물 파손에 대해 얘기하며 관리자 앞에서 명확하게 얘기했다. 한 번만 더 폭력 상황이 예상되는 소음이 발생하면 정말로 경찰을 부를 것이며, 나는 당신들이 만드는 소음에 어떠한 인내심이나 이해도 보일 이유가 없다고.
여기서 또 놀라운 건 윗집 그녀도 층간 소음에 대한 개념을 가지고 있고 혼자 있을 때는 소리를 안 내려고 최대한 노력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습관적인 망치발 걸음은 인식 못하는 것 같지만.
문제는 그녀의 남친이 술을 마시고 와서 싸움이 붙고, 싸움이 점점 격해진다는 것이었다. 유리창을 깬 것도 남친이었다나. 소음으로 화가 나는 것과는 별개로 데이트폭력이 걱정되기 시작했고, 나는 역시나 조용히 하겠다는 약속을 받은 뒤 집으로 돌아와 양치질을 마쳤다.
윗집 옆집 돌아가며 환장의 소음을 벌였고, 불행인지 다행인지 소음유발자 그녀들은 의외로 그렇게까지 무개념녀는 아니었다. 정말 막 나가는 인성이었다면 나와 싸움이 벌어졌겠지만, 그녀들은 외려 썩은 표정으로 노려보는 나를 무섭게 여겼다. 아마도 그녀들 눈에는 내가 뉴스에 나오는 '홧김에 범죄를 저지를' 타입으로 보였을 것이다. 이 상황에서는 그렇게 여겨지는 게 차라리 낫기도 하고.
윗집 그녀에 대해서는.... 술 쳐먹고 저렇게 싸움만 벌이는 남자와 왜 헤어지지 않는 걸까, 라는 의문이 생겼다. 그 외에는 좋은 점이 많은 걸까. 남녀 사이 일은 당사자들만 아는 것이고 오지랖 부릴 필요도 없지만... 이런 일을 접하면 의문이 든다.
왜 자신을 정말 아껴주고 서로 존중할 상대를 찾지 않는 걸까. 왜 누군가에게 '화 내도 되고 폭력을 휘둘러도 되는 상대'가 되도록 스스로를 방치하는 걸까.
단 두 명을 겪었기에 일반화 할 수는 없지만, 그 두 사람의 인상이 놀랍 도록 비슷했다. 위축되어 있고 불안정해 보였다.
층간 측간 소음을 유발하는 사람은 자존감과 행복도가 낮은 걸까....
하긴, 옆집 혹은 아랫집에서 도끼눈 뜨고 "지금 몇 시인 줄 알아?!"라고 하면 위축될 수밖에 없겠지만.ㅡㅡ
뭔가 그 순간의 당혹감이나 불안이 아닌.... 이미 내면에 새겨진 결핍이 드러나는 인상을 가지고 있는 건 내 기분 탓인가.
좀 더 과장해서 생각한다면...
건강한 사랑이나 돌봄을 받지 못하고 배려나 메타인지라는 고등 사고를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 층간 측간 소음을 유발하는 걸까.
1차 문제는 이런 부실한 구조를 건축 허가 내주는 당국과 자재비 아끼려 옆집인지 옆방인지 헷갈리는 집을 지은 시공사 것들이고,
2차 문제는 배려나 메타인지 안되는 열등한 지능을 가진 것들의 행위이고,
3차 문제는 이런 심각한 사회 문제를 수수방관 하는 입법부 것들이고...
가끔 층간소음 기사에 '그러게 원룸 사는 네 인생이 문제'라는 근거도 논리도 지능도 없는 댓글을 보면 실소가 나온다.
내 부모님 집은 강남권과 서울숲이 가까워 집값이 미쳐 날뛰는 지역에 이름 대면 다 아는 브랜드 아파트다. 근데 그 집도 층간 소음이 엄청나다. 유엔빌리지나 청담동 고오급 빌라, 혹은 성북동 고급 단독주택 정도는 되어야 층간 소음에서 자유로울까 싶다.
분명한 사회 구조의 문제를 지나치게 개인의 문제로 축소해서 책임을 전가하는 건 비겁하고 무책임한 짓이다.
여튼 이런 저런 생각이 많아진 나머지 잠 자기는 그른 밤이다.
부디 경찰 부를 일은 없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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