층간 소음과의 전쟁 2 - 가스라이팅과 데이트 폭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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층간 소음과의 전쟁 2 - 가스라이팅과 데이트 폭력

by 이정리 2022. 6. 12.

층간 소음 1차전

 

층간 소음 1차전 이후 한동안 그럭 저럭 평화로웠다.

그러나 약 2주 후, 다시 새벽 3시에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

 

선택적으로 작동하는 내 식스센스는 이번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며 누군가의 개입이 필요한 지점임을 알려 주었지만, 귀찮고 짜증나서 자기들 끼리 지옥의 마라탕에서 데쳐지든 삶아지든 알아서 정리하라는 심보로 애써 귀 막고 잠을 청했다.

하지만 정리는 커녕 점점 소음이 커지고 진정될 것 같지도 않아 결국 모자 뒤집어쓰고 인근 파출소 번호를 검색하며 윗집으로 올라갔다.

 

내가 올라가자 마자 윗집 여자가 나왔고, 나는 나직히 "내가 한 번만 더 시끄러우면 경찰에 신고한다고 하지 않았나?"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역시나 연신 미안하다는 여자. 울었는지 맞았는지 얼굴이 상기되고 눈이 부어 있었다.

그 얼굴을 보고 나는 작은 목소리로 괜찮은지, 폭력은 없었는지 물어보았고 그 여자는 이번에는 폭력이 있었음을 인정했다. 계단에서 잠시 얘기를 나누는 동안 집 문을  나오려던 남친은 나를 보더니 쑥 들어가 버렸다. 그리고 얼마 후 그가 아예 건물 밖으로 나가 버리는 걸 본 뒤 나는 윗집 여자를 내 집으로 데려와 찬물을 주고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2시간 40분에 걸친 대화를 한 줄 요약하면,

여자를 향한 남자의 전형적인 가스라이팅과 데이트 폭력

이었다.

남자가 정말 사례집에 실어도 좋을 정도로 모범적인(?) 가스라이팅을 하고 있었는데, 그가 사용했(다고 여자에게 전해 들은)던 문장 하나 단어 하나가 하도 주옥 같아서 나도 모르게 녹음기를 켤 뻔했다.

 

윗집 여자는 모종의 이유로 자존감이 매우 낮아진 상태였고 심리적으로 상당히 힘든 상태였다.

그래서 자신의 인생은 이미 끝났으며 누구도 자신을 사랑해주지 않을 것이라는 왜곡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사정을 다 앎에도 자신을 좋아해주는 현재 남자친구에게 심하게 의존하고 있었다.

주 양육자는 여자의 현재 상황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으며 과거 여자가 자신의 힘듦을 이야기하려 했으나 '너만 힘든 것 아니다, 남들도 다 그렇게 힘들지만 참고 사는 거다, 유난 떨지 말라'는 주 양육자의 반응에 대화를 포기한 채 혼자만 고민하고 괴로워해 오고 있었다.

 

남자친구도 이런 여자의 상황과 심리를 알고

'나 아니면 너 따위를 누가 만나주냐' 라거나

'나 아니면 너 상대해줄 남자는 없다',

'나니까 너 같은 걸 만나 주는 거다' 라는 말을 수시로 했다.

 

또한 여자의 사회 활동이나 대인관계를 극도로 통제하며 둘의 관계가 외부로 노출되는 것을 막았고, 여자가 다른 남자와 조금만 관련되어도 바로 바람을 피운다고 의심하며 분노와 막말을 여과 없이 쏟아냈다.

 

이러한 남자의 태도에 여자는 남자를 설득하기도 하고 반발하기도 했으나, 남자는 폭력을 휘두르며 오히려

'네가 나를 자극해서 폭력을 휘두르게 한 거다, 내가 폭력을 휘두르는 것도 다 네 잘못이다, 네가 잘 했으면 내가 이럴 일도 없다'

며 모든 책임을 여자에게 전가했다.

 

여자는 이런 남자의 책임 전가를 내면화하여 도리어 사과를 했고, 앞으로는 잘 하겠다고 빌었다.

이런 과정이 반복되며 여자는

'나는 늘 잘못하고 있고, 잘못된 건 다 내 탓이고, 내가 맞을 만 해서 맞는 거다'

라는 사고를 강화하며 심리적으로 더욱 힘들어지고 있었다.

 

 

최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배제하고 요약하는 것 만으로도 다시 뒷목이 그윽하게 당기는 느낌이 든다.

이성과 객관을 유지하며 상대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공감하는 동시에 정리, 요약, 분석에 대안까지 제시하는 사고 훈련이 되어 있는 나도 중간에 이 남자친구라는 작자의 눈알을 파 버리고 싶은 충동을 억제하기 힘들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사실 대화 장면에 없는 타인에 대한 이야기는 의미가 없다.

 

모든 이야기를 듣고 공감, 반영, 요약한 뒤 이런 상태에서도 윗집 여자가 가지고 있는 장점과 자원을 최대한 객관적으로 진솔하게 말해 주었다. 다행히 여자는 자신이 '예전에는 가졌으나 지금은 잃었다'고 생각한 장점이 여전히 남아 있음을 인지했고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짧은 대화를 통해 오랫동안 굳어진 왜곡된 신념 전부를 바꿀 수는 없지만 일단 구체적으로 반박하는 과정도 진행했다.

 

당신은, 우리는 타인의 마음에 없는 것을 창조해낼 정도로 유능하지 않다.

누군가 당신에게 폭력을 행한다면,

그건 그가 원래 가진 폭력이 나온 것 뿐 당신이 없는 폭력성을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당신이 무슨 일을 겪었고 현재 어떤 상태이고 어떠한 잘못을 했든,

당신은 절대 지금 그 남자에게 받는 그런 대우를 받을 필요가 없다.

당신에게 폭언을 하고 당신을 때린 그 남자는 그냥 개새끼다.

 

 

그리고 무엇보다 며칠 전, 주 양육자에게 자신의 상태를 간략하고 효과적으로 전달했고 바로 이 날 주 양육자에게 돌아가 현재 상황에서 분리되는 시간을 가지기로 결정한 상태였다.

 

충분히 휴식을 취한 뒤 남자친구에게 전화로 당분간 거리를 두자는 얘기를 하되, 모든 대화는(거리를 두자는 여자의 말에 남자가 보이는 반응도 고스란히) 스피커폰으로 주 양육자도 들을 수 있도록 하라는 과제를 주었다.

마지막으로 가능하면 다시 돌아오지 않기를 바란다는 말과, 내 번호를 직접 줄 수는 없지만 혹 연락할 일이 생기면 관리자를 통해 전달해도 좋다는 이야기를 한 뒤 아침 6시에 윗집 여자를 보내 주었다.

 

약 2주가 지난 오늘까지 윗집에서는 여자의 목소리도, 싸움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여자가 여전히 심리적으로 매여 있다면 돌아왔을 기간이 지난 건 아닌가... 다행히 남자와 안전이별을 한 것 아닐까 혼자 판단해 보았다.

 

가스라이터이자 데이트 폭력범에게서 물리적으로 분리되는 것,

자신의 내적 외적 자원을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것,

보호 받을 수 있는 안전한 곳으로 피난하는 것,

평생 만나기 힘든 특이한 어른, 유능했던 전직 심리상담사인 나를 만났다는 것

등이 이루어져 예후는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짧은 인연 이었지만 (구)윗집 여자가 자신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행복한 사람으로 살아 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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