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울(Soul),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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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영화

소울(Soul), 2020

by 이정리 2021. 1. 24.

(스포 있음)

 

단지 내 독서실은 폐쇄됐고, 구립도서관도 폐쇄됐고, 카페에는 앉지도 못하고,

반 강제로 집에 감금되어 층간 소음에 시달리며 (밤 10시 넘어서 드르륵 쿵쾅거리는 건 무슨 개념일까)

집 밖에 나가지 않은 지 약 보름.

억지로 공부하다 특이점이 오고 말았다.

You Spin Me Round

지금 내 상태. 음악과 뮤직비디오 모두 아주 딱이다.

며칠만 더 있으면 지기 스타더스트와 화성으로 날아가 머리에 꽃도 꽂을 수 있을 것 같아 혈육소환술을 쓰기로 했다.

 

최대한 사람 많은 시간을 피해 조조로 선택한 한 영화는 <소울>.

재즈를 사랑하는 무명 피아니스트 조 가드너는 꿈에 그리던 밴드의 피아니스트가 될 기회를 얻게 되지만... 맨홀에 빠져 머나먼 세상으로 가야 할 위기에 놓인다. 꿈의 공연을 앞두고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던 조는 지구로 내려가기를 거부하는 영혼 22의 멘토가 되어 지구로 돌아갈 계획을 세운다.

어떻게든 지구로 돌아가 못 다한 꿈을 이루고 삶을 살아내려는 조와, 어떻게든 삶을 살아내지 않으려는 영혼 22.

이렇게 상반된 둘은 좌충우돌 사건들을 겪으며 이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삶의 다른 면을 발견하게 된다.

 

영화 보면서는 거의 안 우는 편임에도, 인사이드 아웃을 질질 울면서 봤기 때문에 기대했던 영화.

영화는 기대보다 조금 더 좋았다.

특히 요즘 시국에, 지금 내 상태에 참으로 시의적절했던 영화.

 

늘 목적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고 믿었다.

식충이로 살다 가는 인생은 가치가 없다. 뭐라도 해야지.

 

아주 오랫동안 아팠고 무기력했을 때, 루이자 올컷의 소설 <작은 아씨들 2> 중 베스의 대사를 읽었을 때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죽어가던 베스는 가장 친한 언니 조의 품에서 "살면서 너무나 이루어 놓은 것이 없어서, 그게 너무나 슬펐어. 할 줄 아는 것도 없고 집에만 있는... 나는 언제나 작고 어리석은 베스였어."라고 말했다.

꼭 나를 표현하는 말 같았다. 건강도 재능도 없어서 다른 이들이 누리는 삶의 기쁨을 그저 부러운 눈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는 작고 어리석은 사람.

 

깊은 산 속에 덩그러니 홀로 자란 나무 같았다. 태어난 의미도 목적도 없고, 타인과의 관계도 없이 조용히 태어나 조용히 자라다 아무도 모르게 스러져가는 나무. 그런 나무는 왜 태어난 걸까? 아무 의미도 없는 이런 삶은 왜 존재하는 걸까?

오직 전지(全知)한 신의 인식 속에서만 존재를 증명 받는다는 버클리주의는 잠깐 위로가 되긴 했지만... 신도 나를 버린 것 같을 때는 답이 없었다.

 

오늘도 마음은 참 복잡다단하다.

내 선택이 맞는 걸까.

이대로 좋을까.

그냥 다른 걸 해볼까.

다른 사람들은 다 제 때 제자리를 찾아 가는데 왜 나는...

 

이 영화는 그런 고민과 의심에 한 가지 대답을 해준다.

나의 존재 자체로 목적은 이루었다고.

나의 존재로 이루어 낸 내 외부의 '어떤 것', 성취나 목적으로 증명 받는 것이 아니라...

나의 존재 자체가 가치 있는 것이고 증명이라고.

꿈, 열정... 그런 빛나는 단어조차 나를 증명하는 것이 아니다.

꿈이 없어도, 열정이 없어도 그냥 무심히 길을 걷는 나 자체로 괜찮은 거라고.

 

가치 있는 것은 삶 자체이다.

삶을 수단으로 이루어낸 어떤 것이 아니라.

 

낯익은 동네 골목길을 걸으면서,

바위에 나른히 앉아 있는 고양이를 보면서,

제법 맛있는 바지락칼국수를 먹으면서,

박효신의 <야생화>를 들으면서,

이렇게 가끔 마음 따뜻해지는 영화를 보면서...

문득 만족스럽고 행복감을 느끼는 그 찰나의 순간들. 그것이 삶이고, 그것으로 족한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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